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핑-톈진 전투 (문단 편집) === 전투의 시작 === 그러던 중 7월 25일 오후 4시, 동북방면에서 일본군 100명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톈진-베이핑 간의 낭방에 도착하여 전화선 수리를 명목으로 동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낭방의 지휘관 38사단 소속 113여단장 유진삼이 일본군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중국군 113여단과 대치하였다. 7월 26일 0시를 기해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돌연 발포하여 첫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 새벽에 일본군 전투기 14대가 폭격을 감행함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첫 폭격이 벌어졌다. 이어 오전 7시, 텐진으로부터 일본군 증원부대가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퍼부어 낭방의 중국군을 궤멸시켰다. 오전 10시, 중국군은 낭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이 소식에 [[이시와라 간지]] 등 불확대파들조차 "이제는 국내 사단을 증원하는 수밖에 없다. 때를 놓치면 끝장이다. 지급처리를 요한다."고 태도를 바꾸는 등 일시적인 확전을 지지했다. 7월 26일, 낭방을 점령한 일본군은 톈진-베이핑 사이의 북창, 낙대 역을 잇달아 점령하고 철도를 차단했다. 동시에 가츠키 사령관은 쑹저위안 앞으로 2가지 사항을 요구하며 따르지 않으면 일본군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 1. 루거우차오 및 팔보산 부근에 배치되어 있는 제36사단은 28일 정오까지 장신점으로 후퇴시켜라. * 2. 베이핑성 안의 32사단, 서원의 37사단은 28일 정오까지 영정하 이북으로 이동한다. 이들 부대는 계속해서 바오딩 방면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이날 저녁 6시, 일본군 1개 대대가 자신들을 야외 훈련에서 돌아온 일본 총영사관 위병들이라고 속이고 베이핑 광안문으로 난입하였다. 이를 간파한 29군 25독립여단 산하 679단 단장 유여진은 일본군을 광안문 안으로 불러들인 다음에 재빨리 문을 닫고 일본군을 포위하여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궤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쑹저위안이 급히 개입하여 이들을 보내주라고 지시한 덕에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이것을 광안문 사건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